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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nu Mosir"
‘아이누 모시리’와 ‘홋카이도’
이 땅의 선주민인 아이누는, 자신들의 생활권을 ‘아이누 모시리(인간의 대지)’라 불렀습니다.
와진(아이누가 일본인을 부르던 호칭)의 침입은 13세기 죄수 유배를 시작으로, 11세기 후반부터는 침략하는 와진과 저항하는 아이누의 싸움이 1세기에 걸쳐 반복되었습니다. 저항한 아이누는 학살당했고, 와진의 지배가 확대되어 갔습니다. 또, 에도 시대 말기, 마츠마에번은 아이누를 예속시켜 와진이 원하는 대로 약탈 교역과 수탈을 자행했고, 아이누 인구를 격감시켰습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정부는 홋카이도를 식민지로서 개척하는 수많은 정책을 추진하였고, 이로 인해 본래의 아이누 생활권은 모두 와진에게 빼앗겼습니다. 또한, 일본 정부는 아이누에게 ‘황민화’와 ‘창씨개명’을 강요하여 아이누의 생활양식마저 빼앗아간 점은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일본의 아이누 정책에서는 후대의 한국이나 대만에 대한 식민지 정책의 원형이라고 할 만한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메이지 시기 이후, 홋카이도는 석탄 채굴 및 개발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이시카리와 소라치 등에서 채굴한 석탄을 오타루항으로 수송하기 위한 철도가 놓이고, 항구에는 석탄 하역 노동자가 모였습니다. 또, 유바리에서 채굴된 석탄이 제철・제강 공장이 있는 무로란으로 운반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각 지역에는 탄광 마을이 형성되었습니다. 일본 국가와 자본의 결합, 유착에 의한 식민지 경영 아래, 석탄과 철을 중심으로 철도・항만도 정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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